필요할 때 합시다 ①미리 공부하면 대비일까, 낭비일까?

졸업하면 공부를 안 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졸업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배워야 할 게 참 많습니다. 다행이도 무언가를 배우는 게 즐거웠습니다. 일을 배울 때도 배경지식 덕분에 습득이 빨랐습니다. 필요한 자격증을 따기 위해 밤낮을 불태우시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일에서 벗어난 취미 영역에서도 공부를 하게 마련이에요. 찾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몰입하면서 지식을 쌓게 됩니다. 취미가 너무 많아서 정리하기 위해 ‘취미 다이어트’를 주제로 글을 썼던 적이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미완결된 글이라 다시 한번 손 대야겠습니다.)

자잘하게 흩어진 취미를 모으자 15개 정도였습니다. 그 취미들은 모두 일정 수준 만큼 도달했었습니다. 문구를 제작하기 위해 인쇄를 찾아보고, 자작곡을 만들면서 화성학을 배우고, 블로그에 글을 쓰기 위해 검색엔진 최적화와 광고 노출, 검색이 잘 되는 키워드를 고민했었습니다.

노트북과 책 여러 권을 펼쳐두고 공부하는 모습
일본 만화 안 보는 오타쿠 같은 느낌이었달까…?

무언가에 관심이 생기면 그걸 찾아보고 줄줄 읊을 정도로 머릿속에 넣어야 마음이 편했습니다. 게임을 해보는 걸 넘어서 만들어봐야 직성이 풀렸어요. 그 경험들이 저에게 꽤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html과 css로 홈페이지 만든 경험을 살려 포트폴리오를 워드프레스로 구축했습니다. 어깨 너머로 배운 마케팅을 상세페이지에 접목했고요. 예전에 취미로 영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쉬운(?) 업무는 금방 쳐냈죠. 취미로는 자작곡도 몇 개 만들어서 공연도 했었습니다.

음,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었어요. input에 비해 output이 너무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가성비 최악. 저는 여태껏 잘못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책 많이 읽고, 유튜브 보고, 많이 보고 듣고 진득하게 소화해서 내 걸로 만들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었어요.

휴대폰 액정에 고민하는 이모지가 표시되었다.
Hmmm… ©unsplash

그리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었어요. 나머지 ‘뭐부터 할까?’ 고민만 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도 많았습니다. (행복한 고민이긴 했지만요.) 뭔가를 알아보는 데에 계획이 없었어요. 그때마다 궁금한 걸 찾았습니다. 어디까지 해야겠다는 목표도 없었습니다. 그저 배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이것 저것 다 잘하고 싶었습니다. 조금 부끄럽지만, 좋아하던 일들을 모두 끌고 가려고 했던 날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을 생각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저처럼 좋아하는 일을 많이 안고 있던 분들과 의견도 나누어보고 싶어요.


내가 받아들이는 정보들은 대비일까, 낭비일까?

공부해도 써먹을 데가 없다면 ‘낭비’

‘그래요, 배워두면 언젠간 쓸 때가 있겠지요.’

제 블로그 about 페이지에 적어둔 글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보다는 낫지 않냐고요? 맞습니다. 뭔가를 하면 분명 어떻게든 도움이 됩니다. 사람 일은 모르니까요. 배운 내용들을 연결하면 다른 일을 배우기 쉬워져요.

그런데, 미리 배워둔 걸 써먹을 ‘그 때’ 말이에요. 생각보다 잘 안 옵니다.

경험이 없는 이론은 반쪽에 불과해요

어떤 분야에서 특출나게 뛰어난 일잘러를 전문가라고 부릅니다. 전문가의 길로 어떻게 들어설 수 있을까요?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결과물을 만들고, 경험을 쌓으면 됩니다. 손영우 교수의 ‘전문가, 그들만의 법칙’ (샘터, 2005)에 따르면 초보자에서 지식을 습득해 체화하면 숙련가가 됩니다. 남는 시간을 문제 해결에 재투자하면 전문가가 됩니다.

전문가가 되는 과정을 요약한 다이어그램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소다 씨. 한 장 두 장 그리다 보니 익숙해집니다. 한 장을 완성하는 시간이 점점 짧아집니다. 더 멋진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남은 시간에 디테일을 손봅니다. 빛과 조명에 관한 책을 더 읽어봅니다. 그림은 퀄리티가 점점 더 높아지겠죠.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아무리 열심히 머릿속에 넣어도 응용하지 않으면 발전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한때 영상을 만들고 콘티 짜는 법, 구성, 색상 보정 방법 등을 머릿속에 넣었습니다. 지금은 영상을 안 만듭니다. 안타깝게도 다시 영상을 만들지 않는 한 꺼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본의 아니게 아끼다 💩이 되고 말았습니다. 멈춰선 돌에 이끼가 끼고 말았습니다.

저장까지는 좋아요, 빨리 불러올 수 있나요?

여태껏 뭔가를 배워두면 언젠가 써먹을 때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 만화책을 만들면서 터잡기를 연습했습니다. (인쇄에서 흔히 ‘하리꼬미’라고 부르죠) 홈페이지도 만들고, 영상 만들면서 음악 편집도 했었지요. 그 자잘한 지식 조각들이 최근에도 많이 도움 되었습니다. 책자를 만들고, 워드프레스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자작곡을 집에서 간단히 믹싱을 할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것이 ‘필요할 때’ 익혀야 합니다. 많은 걸 한번에 머릿속에 넣으면 띄엄띄엄 조각 채우듯 익히게 됩니다. 나중에 다시 불러오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사람 기억은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배하고, 머릿속에 저장하고, 꺼내옵니다. 꺼내는 것까지가 기억의 단계예요.

3d 이미지를 만드는 그래픽 프로그램 블렌더(blender)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0년 전, 학교에서 3ds MAX를 배웠습니다. 한 학기였지만 모델링과 렌더링 기초를 익히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3d 그래픽을 따로 연습하지 않았습니다. 과목 중 하나로 재미있었다~ 정도였죠.

노호혼 3개가 엇갈리게 놓여있는 3d 그래픽
우리 학교 우리 과 학생이면 만들었다는 노호혼.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 기술을 써먹을 때가 옵니다. 딱 10년 후 시린지필터 브로슈어를 만들 때 2d 그래픽을 함께 만들었는데요. 3d로 들어가도 괜찮겠다 싶어서 3d 그래픽으로 제안했습니다. 모델링·렌더링 개념도 있겠다, 시린지필터 생긴 모습을 보니까 어떻게 만들지 견적이 나오더라구요.

시린지필터를 손 위에 둔 모습
요렇게 생긴 주사기 필터랍니다

각 파트별로 단면을 만들어서 중심축 기준으로 회전체를 만들면 될 것 같았습니다. 결국 3d 그래픽을 완성해서 먼저 작업했던 2d 그래픽 대신 브로슈어에 넣었습니다.

도전에 성공해서 기뻤지만 효율성은 낮았습니다. 10년 전이지만 3ds MAX를 먼저 배웠기 때문에 모델링 개념은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튜브를 보며 블렌더를 다시 따라해야 했습니다.

안 쓰면 잊어버려요. 어제까지 블렌더로 뚜가닥 뚜가닥 작업하던 사람 vs 필요할 때마다 다시 찾아봐야 하는 사람. 기억을 꺼내오는 속도가 다릅니다. 심지어 이런 작업이 가.끔. 있다면? 뜨문뜨문 꺼내기 때문에 매우 매우 비효율적입니다. 운이 안 좋으면 결과물이 멋지게 나와서 똑같은 상황이 반복됩니다.

다행이도 저 시린지필터 브로슈어는 완성될 때까지 회사에서 충분히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덕분에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공부한 내용을 당장 활용하기 어렵다면 ‘낭비’

일의 기술을 논했으니 이번에는 사람 기술 얘기를 해볼까요? 어떤 집단에서 잘 지내기 위해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심리학 책을 종종 읽었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100번대 책을 쭉 살피다가 끌리는 게 있으면 대출해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심리학 책을 몇 권 읽으면 누군가의 입장에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스스로의 정체성이 약해집니다. 남의 입장에서 상황을 볼 수는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보기 어려워져요. 나는 누군가의 가족이자 누군가의 연인이기도 하고, 어딘가의 직원이자 누군가의 친구 혹은 적이기도 합니다. 관계 하나에 입장이 하나입니다.

재미로 읽었던 책이 시기를 잘못 만나서

어딘가의 직원이면서 1인 사업자였을 때가 있습니다. 둘 다 해봤으니 양쪽을 모두 이해할 수 있어요. 가끔 회사 복지가 서운하면 내가 이 곳에서 받은 만큼 일하고 있는지 점검해봅니다. ‘나라면 나를 고용할까?’ 그래도 저는 직원 입장에 훨씬 가깝습니다. 갖고 있던 사업자가 일을 대체할 정도로 크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직원’ 위치에서 성실히 맡은 업무를 다해야 합니다.

일반 사원일 때 이야기입니다. 책으로 사장 입장을 간접 경험하면 사장님의 마음이 이해가 될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장님들이 고생하는 얘기들을 읽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놀랍게도 어느 새 스스로를 사장으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직원인 제 위치를 망각해버렸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일해야 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사장이 해야 할 일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자기 위치를 잊어버리면 서로가 일하는 영역을 침범할 수도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여러 명이 회의하는 모습
사실 작은 회사에서는 여러 일을 맡으니 쉽지가 않죠

타이밍이 맞지 않는 조언을 마구잡이로 먹었더니

그리고 책에 나오는 사장님(대개 좋은 면만 보임)과 우리 사장님을 비교하면서 남 탓을 자꾸 하게 됩니다. ‘거 봐, 보상이 짜니까 직원들이 도망가지.’ 그 전에 해야할 일은 잘 했나요? ‘저 일은 왜 저런 방향으로 결정하는 거야?’ 그건 사장님 몫이에요.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 자료였습니다. 단지 시기를 잘못 만나서 마이너스가 되어버렸어요.

못 먹는 음식을 억지로, 게다가 많이 먹으면 체하잖아요. 똑같아요. 목적과 위치에 맞지 않는 조언을 마구잡이로 먹다간 반드시 탈이 납니다. 저도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

그럼 언제 공부해야 ‘대비’인가요?

필요할 것 같을 때 하면 됩니다. 어떤 게 보인다고 냅다 해보지 말고, 필요할 것 같다면 그 때 해도 늦지 않아요.

  • 회사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데 영상도 곧 작업할 것 같아
  • 예적금만으로는 안 되겠어, 투자를 해야겠어
  • 승진했는데 팀워크 만들기가 너무 어렵네
  • 직장 다니는데 나도 부캐로 투잡 하고 싶어

세상에 널린 게 정보입니다. 그 상황에 맞는 정보가 이미 있어요. 일단 배우고 보는 건 사용하지도 않는 물건을 ‘언젠가는 쓰겠지’ 하고 자꾸 모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필요없는 내용은 가지를 쳐서 머릿속을 청소해야 합니다.


마치며

어릴 때부터 뭔가를 배우는 걸 좋아했습니다. 재미도 있고 일단 배워두면 쓸 데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과거의 저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적어보았습니다. 10대 때부터 주위에서 저에게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늘 말했습니다. 말처럼 쉽지 않았죠. 많은 걸 겪고서야 몸소 느꼈습니다.

‘아, 정말 필요하다 싶을 때 해도 늦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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