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틀탑 라벨 스티커를 리디자인하는 과정

2023년 초반 Safetyline에서 일할 때 리디자인했던 보틀탑 라벨 이야기.

safetyline는 hplc(고성능 크로마토그래피) 분석 분야를 다루고 있습니다. 정말 쉽게 말하면 저 사람이 마약을 했는지 알기 위해 머리카락을 뽑아다 검사할 정도의 정밀한 분석 실험입니다. 시험용 재료에 있는 성분을 낱낱히 파헤쳐버립니다.

어쩌면 평생 모를 수도 있는 분야기도 합니다. 저도 여기서 일하기 전에는 이런 분야가 따로 있는지도 몰랐으니까요.

Agilent HPLC 기기
이렇게 생긴 기기 있어요 🤭🤭

필터에도 브랜딩

저 hplc 기기가 빨아들이는 액체가 오염되면 실험 정확도가 낮아지니까 작고 정교한 필터를 추가로 장착할 수 있게 만든 솔루션이 보틀탑입니다.

세이프티라인에서는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조그만 필터에도 브랜드 로고 스티커를 붙여두었습니다. 뒷면에는 날짜를 적는 편의성까지 고려했습니다. 이렇게 세이프티라인에서는 브랜딩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세이프리타인 보틀탑 라벨
©Safetyline

그리고 여느 브랜드와 다름없이 필터 제조 과정에서 라벨링 과정을 거칩니다. (사출로 몸에 콩 찍히는 게 아니라면 대개 라벨링을 합니다) 함께 계시는 직원 분이, 혹은 사장님이, 아니면 알바생이, 저도 시간이 될 때마다 조금씩 라벨링을 도왔습니다. 단순 작업을 하다보면 디자인할 때 과열된 머리가 식기도 해서 좋아하는 작업 중 하나입니다.

세이프리타인 보틀탑 라벨 앞면
©Safetyline

‘붙이기 짜증나’ 한 마디로 시작된 프로젝트

양 끝을 맞붙이는 방식으로 라벨을 붙이다 보면 맞붙이면서 실수도 하고, 새로 붙이기도 합니다. 정확히 끝을 맞춰서 붙이는 게 쉽지 않거든요.

스티커 양 끝을 이렇게 잘 맞춰서 붙이면 되는데, 이거 붙이기 은근히 짜증나 ㅎㅎ

라벨 디자인 변경 전

업무 백업을 받을 때 사장님이 한마디 툭 던지셨습니다. 그 말이 제 마음 속의 뭔가를 건드렸습니다. 평소 사장님이라면 사용하지 않으실 단어가 미끼가 되었고, 저는 덥썩 물어버렸습니다.

‘저 과정을 쉽게 바꿀 수 있다면!’

정식으로 진행한 업무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인지해버린 된 이상 꼭 해결하겠다는 오기가 스물스물 올라왔습니다. 스치듯 지나간 문제여야, 내 일이 아니어야 아이디어도 잘 나오고 더 재밌거든요.

그리고 스티커 디자인을 몇 번씩 바꿔보다가 최적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라벨 디자인 변경 후

이전 제품에 사용하던 스티커 디자인은 앞뒤를 바로 맞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게다가 스티커가 길어서 각도가 조금만 틀려도 티가 날 확률이 높습니다. 오차 0.5mm를 허용해도 붙이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죠.

위 그림 같은 스티커 구조가 떠올랐습니다. 띠 오른쪽을 먼저 필터에 맞붙인 후 남은 라벨의 반을 접어서 서로 부착합니다. 남은 스티커를 반으로 접으면 라벨링 끝. 중간에는 골 부분을 만들었습니다. 모양을 힘들게 따로 맞추지 않아도 반으로 쉽게 접히도록 한 작은 설계입니다.

실제로 만들어보기

목업 작업

일반 라벨지로 만든 샘플 라벨
처음에는 이렇게 작은 모양이었답니다
일반 라벨지로 만든 샘플 라벨
일반 라벨지로 먼저 만들어서 테스트하기

화면으로 보는 모습과 실제로 완성된 모습이 다르니 발주 전에는 꼭 실물로 만들어봅니다. 대량(?)1 인쇄하는 스티커 특성상 사이즈에 미스가 생길 수 있으니 집에서 라벨지에 프린트해서 직접 붙여보았습니다.

©Safetyline

이렇게 완성된 보틀탑 라벨 리디자인. 앞쪽에는 로고의 일부분만 넣어서 아이덴티티를 강조했습니다. 기존 스티커에서 로고가 구겨지는 것이 싫어서 풀 로고를 옆면에 이어지도록 배치하고 태그 부분에는 대표 심볼만 넣었습니다.

뒷면에 있는 data란은 어쩌지

세이프리타인 보틀탑 라벨 뒷면
이전 라벨 ©Safetyline

스티커 뒷면은 날짜를 쓰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DATA’를 제외하면 빈 칸이었는데, 가로 길이가 줄어들면서 날짜 쓰는 칸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연구원 분들이 날짜를 칸에 맞춰서 쓸지 고민했습니다.

‘이거다!’

경필쓰기 학습지
글씨는 이렇게 쓰세요

어릴 때 쓰던 경필 쓰기를 떠올렸습니다. 한 줄은 원래 글씨가, 아랫줄에는 글자가 흐트러지지 않고 따라 쓰기 위해 회색 보조 글자가, 그 아래 줄에는 보조선이 따로 없었습니다. 글씨를 쓰면서 자전거 보조 바퀴처럼 회색 선을 참고해 위에 똑같이 쓰면 됩니다.

경필 쓰기를 응용했습니다. 옅은 회색으로 YYYY/MM/DD를 라벨에 넣어서 회색 글씨 위에 날짜를 적을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보틀탑 필터의 새 라벨 디자인 뒷면
©Safetyline
신 라벨과 구 라벨 뒷면
날짜 적는 방법 (좌: 신 필터/우: 구 필터) ©Safetyline

날짜를 회색 글자 란에 맞추어 적은 모습입니다. 가로 길이를 조금 줄이면서도 메모하기 편하게 가이드 글자까지 넣었습니다. 태그 가로 길이가 줄어들었지만 세로 길이가 지난 버전보다 조금 더 길어진 것도 한몫했습니다.

재질도 중요하지

이전에 나가는 필터 스티커에 실험 용액이 잘 묻어서 날짜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을 사장님을 통해 들었습니다. (최종 소비자인 연구원들의 의견입니다.) 연구원 분들의 의견을 피드백하여 재질을 강접 스티커에서 유포 스티커로 바꾸었습니다. 아트지 재질은 종이지만, 유포지는 엄밀히 말하면 종이가 아니라 플라스틱 pp이기 때문입니다.

스티커의 날짜 부분에 세 겹이 겹치는 구간이 잘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유포지에 uv 인쇄하면서 접착력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uv인쇄 표면은 오돌토돌한 질감이어서 스티커가 잘 붙지 않습니다.

사장님은 이 정도 떨어지는 건 문제가 없다고 하셨지만, 다른 직원 분이 보셨을 때 로고 라벨이 잘 붙어있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이후에 초강접 아트지로 변경하셨습니다. 현재 단가를 고려했을 때 재질과 접착력을 함께 잡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별도로 수정은 하지 않고 프로젝트를 종결했습니다.

마치며

신 라벨과 구 라벨 앞면
신 라벨(좌)와 구 라벨(우)

“사장님, 이거 한번 봐주세요. 지난번에 스티커 붙이는 작업이 번거롭다고 하셔서 보완점을 생각해왔습니다.”

사장님께 스티커 샘플을 보여드리며 스티커 교체를 제안 드렸습니다. 사장님은 시키지도 않은 일인데 먼저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제시해주어 고맙다고 하시며 별다방 쿠폰을 주셨습니다. (^_^) 이후에 나가는 보틀탑과 짝꿍필터 웨이스트탑 EF61 라벨도 모두 새로운 형태로 교체되었습니다.

분담받은 일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더 신경쓰고, 조금은 마음대로 제안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더 편하게 바꾸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회사와 저 모두 나름대로 윈윈인 사이드 프로젝트였습니다.

  1. 라벨링 하는 입장에서 재고 1,000개는 대량이지만, 인쇄에서 작은 스티커 1,000장은 소량에 가까운 수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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